박영숙: 그림자의 눈물
아라리오갤러리는 여성 사진가로서 한국 현대 사진사와 페미니스트 운동에 주요한 역할을 해온 박영숙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박영숙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불온한 배제의 대상으로 여겨진 여성성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도발적인 인물 초상사진을 주로 작업했다. 그는 여성의 신체를 작업의 전면에 위치시켜 여성의 몸과 자아에 대한 사회적 억압, 부조리, 성적 권력 구조에 문제를 제기해왔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처음으로 인물이 아닌 자연만을 담아낸 <그림자의 눈물> 연작 18점을 선보이며, 삶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과 끈질긴 탐구에서 비롯된 여성, 그 정신의 근본을 쫓아온 박영숙의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고자 한다.
박영숙의 <그림자의 눈물>은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첫 번째는 인물의 부재이다. 기존의 인물 사진 작업은 여성의 신체가 작품의 화면 전체를 압도하는 구도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여성이라는 존재를 각인시키려는 과감한 시도의 결과물이었다. 반면, <그림자의 눈물>은 여성의 신체가 아닌 곶자왈이라는 제주도의 한 지역을 담고 있다. '가시덤불 숲'의 제주방언인 곶자왈은 쓸모가 없어 버려진 땅이기에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을 의미하기도 한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자기 멋대로 자란 숲에서는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진동한다.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은 여기, 이 금기의 장소를 기어코 담아낸 작가의 시선은 누군가 존재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며,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여성의 의지와 그 영적인 울림을 내면의 목소리로 바꾸고 있다.
이 시리즈의 또 다른 축이 되는 것은 인물이 부재한 자리를 채우는 오브제들이다. 박영숙은 지금까지 그가 수집해왔던 골동품 사진, 분첩, 웨딩드레스와 같은 물건들을 곶자왈에 배치했다. 삼켜질 것 같이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 사이에 무심히 놓인 오브제들은 그의 존재를 인지하게 하는 장치이다. 사람의 출입이 금지된 곳에 침투한 박영숙의 흔적이 불협화음으로 울리는 이 풍경은 관람객들을 금기된 것과 허락된 것, 일상적인 것과 신비로운 것, 무의식적인 것과 의식적인 것들이 맞닿는 교차로로 이끈다. 금지된 곳에서 다시 시작되는 길, 곶자왈로 향한 이 길은, 작가의 말을 빌어 수 많은 여성이 "진정 그리 살아 내고 있었던" 길이 아닐까. 그 길은 여성의 삶과 박영숙의 정신을 엮어온 성찰의 길이며, 자유로운 정신의 무한한 활동을 통해 확장되고 있는 박영숙의 예술 세계로 열린 길이 될 것이다.
1941년 천안에서 태어난 박영숙은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와 동 산업대학원 사진디자인학과를 졸업하였다. 1975년에는 UN이 제정한 '세계여성의 해' 기념으로 '여성연합'이 주최한 《평등, 발전, 평화》 전시에 초대받아 다양한 여성 현실과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선보인 사진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40대에 들어 선 1981년부터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1992년부터는 민중미술계열의 페미니스트 단체인 '여성미술연구회'에 가입하여 페미니즘 운동에 앞장섰다. 작가는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경기도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한미사진미술관 등 유수의 국내외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었으며, 2002년 광주비엔날레 《멈춤, 止, PAUSE》에 참여하였다. 2006년 한국 최초의 사진전문갤러리인 트렁크갤러리를 개관하여 2019년까지 운영하였다. 2016년에는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사진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성곡미술관, 국가인권위원회, 이화여자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등 다수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