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상: New Structure and Relief

7 July - 21 August 2016 Seoul
Press release

권오상의 작품은 세이렌의 노래처럼 의지와 상관없이 시선을 빼앗아가는 구석이 있다. 오디세우스를 향한 세이렌의 유혹만큼 시각적으로 달콤한 작품들은 관람객을 현혹시키고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씩 다가가게 하지만, 이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그 속에서 툭툭 튀어 오르는 조각의 언어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성찰이다. 그래서 권오상의 작품들 속에서 정처없이 헤매다가 전시장을 나설 때는 꼭 한번씩 되묻게 된다. 조각의 언어나 행위, 그리고 그 존재론에 대해.  

 

권오상은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모델링에 의한 재현적 구상 조각의 표현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조형 구조에 탐닉하고 실험적인 매체 융합을 시도해온 작가다. 작가는 십 수년간 끊임없이 다양한 매체와 이미지들 속에서 조각의 새로운 지층을 찾아내고 그 결을 다듬어가는 작업을 했고, 그 기간 동안 다양한 구조적 변주를 거쳐 여러 연작들을 소개했다. 예를 들어, ‘데오도란트 타입 Deodorant Type’ 연작에서는 지표가 되는 대상을 직접 찍은 사진들을 조각의 매체로 제시하고, 가벼운 조각을 표방해 조각의 확장을 논했다. ‘더 플랫 The Flat’ 연작에서는 자신이 집요하게 채집한 동시대 문화를 대변하는 이미지들의 태생적 평면성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면서도 입체적으로 구성하고, 이후 다시 그 구조를 평면으로 되돌리는 아이러니를 보여줬다. 이 둘은 이미 오랜 연작들임에도 불구하고 평면과 입체, 환영과 실재, 그리고 지표의 문제 등 여전히 진지하게 이야기해볼 수 있는 새로운 쟁점들을 끊임없이 이끌어낸다.

 

이후 작가는 조각의 전통적 재료인 청동을 이용해 조각의 이상향 중 하나, 즉 대상이 원래 가지고 있는 형태를 그대로 재현해보고자 했던 욕망을 표현하되 여전히 원본이 아닌 이미지나 관념 속 대상을 만들어낸 ‘더 스컬프처 The Sculpture’ 연작들을 선보였다. 그리고 지표가 있는 사진과 채집한 이미지들, 인물과 동물, 일상의 오브제들을 무분별하고 경계없이 섞고 쌓아 올리는 조각적 행위를 통해 새로운 조형미를 구축한 ‘매스패턴스 Masspatterns’ 연작이 있다. 이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작가는 조각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사유를 쉴새없이 던져댔다. 드러내는 방식이나 다루는 이미지들이 지극히 일상적이고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작가의 물음은 울림이 컸고, 그가 다루는 매체와 실험들의 참을 수 없는 동시대성은 담론화되기 충분했다. 그리고 최근 작가는 새롭게 변주된 두 개의 연작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본 전시 <New Structure and Relief>에서 소개되는 두 연작 <뉴스트럭쳐 New Structure>와 <릴리프 Relief>가 그것이다.

 

‘뉴스트럭쳐’와 ‘릴리프’. 권오상 작가의 명명법이 돋보이는 제목답게 명징하다. 그간 선보인 ‘더 스컬프처’, ‘더 플랫’, ‘매스패턴스’ 연작 등에서도 유추하듯, 작가는 군더더기 없는 제목들을 통해 명확하게 생각의 궤도를 밝히고 이미 시작점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질문을 정확히 던진 셈이다. ‘뉴스트럭쳐’ 연작은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의 ‘스테빌(Stabile)’ 연작을 차용한 작업이다. 칼더의 스테빌 조각은 물질성에 한정된 조형물로서의 의미보다는 작품을 둘러싼 시공간, 즉 외부 환경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에 큰 의미를 갖는다. 권오상의 ‘뉴스트럭쳐’ 연작도 비슷한 맥락에서 공간성을 담지한다. 작가는 채집한 사물의 이미지들을 크게 확대한 후 평평하게 제작하고 그 면들을 입체적으로 새로이 구조화했다. 완성된 조형물은 특정한 이미지와 그에 걸맞는 형태를 구축하고 있지만, 정작 작가는 내러티브나 목적을 갖고 제작하기 보다는 자율적이며 무의식적으로, 특히 지극히 심미적인 판단으로 형태를 다듬어갔다. 그 결과 칼더가 만든 조각의 구조가 추상적인 색면의 이상적인 균형을 통해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가 논한 대로 작품 자체 뿐 아니라 외부 환경을 이용한 연극성을 창출해낸 것처럼, 권오상 작가의 ‘뉴스트럭쳐’ 연작들이 선보이는 공간적 미장센 또한 다감각적인 효과를 창출한다. 토마스 만 (Thomas Mann)이 <마의 산>에서 공간은 사건을 묘사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한 바와 같이, ‘뉴스트럭쳐’ 연작이 빚어내는 공간 또한 특정 내러티브가 없어도 조각 특유의 공간성과 연극성을 통해 사건을 만들어내고 표현하는 힘을 갖는다. 그 공간에서 어떤 사건을 연상할지는 전적으로 관람객의 몫이다.

 

‘뉴스트럭쳐’ 연작에서 공간성을 담지한 조각 언어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면, ‘릴리프’ 연작에서는 권오상 작가의 전매특허인 이미지 채집과 조각적 배치에 주목해야 한다.  ‘릴리프’ 연작은 동시대 글로벌 문화 트랜드를 가장 빠르고 정확히 읽을 수 있는 디자인 잡지 <월페이퍼 Wall Paper>에서 채집한 수많은 이미지들 중 일부를 선별한 후, 하나의 이미지에 또 하나의 것을 더해가면서, 즉 덩어리를 붙여가며 완성해나가는 소조 작업이다. 이 연작 또한 채집된 이미지들을 특정 내러티브나 구체적 의미에 기반하여 구성하는 게 아니라, 마치 놀이처럼 즉흥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이미지 덩어리를 빼고 더하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탄생한다. 그간 사용하지 않았던 나무라는 매체를 선택해 또 한번 나름의 매체적 상상력을 발휘했고 새로운 자극을 스스로 불어넣었다. 권오상이 그간 선보였던 연작들은 유난히 강렬한 색채를 자랑했는데, 나무라는 매체적 특성으로 인해 한층 색이 바래 무게감이 더해진 작품들은 구조 그 자체나 매체에 조금 더 집중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뉴스트럭쳐’ 연작과 ‘릴리프’ 연작은 작가의 이미지 채집에 대한 욕망과 함께 특유의 무의식적인 자율적 구축이 더해져 새로운 조각적 상상력을 보여준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미지 채집과 배치에 대한 부분은 기실 이들 연작 뿐 아니라 권오상 작품을 논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지점인데, 그의 작품들에서는 이미지가 항상 넘쳐난다. <월페이퍼>에서 하나하나 공들여 집착적으로 채집한 이미지의 다양함은 작가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선택 경향을 보여주며, 이는 작가의 의도를 벗어난 동시대의 집단 정신이나 집단 기억으로까지 확대 해석될 수 있다. 결국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의 ‘므네모시네 아틀라스 Mnemosyne Atlas’와의 비교가 불가피하다. ‘더 플랫’ 시리즈가 더욱 그러한데, 작가가 채집한 동시대 이미지들의 집합체는 바르부르크가 논의한 무시간적 기억의 지층을 보여주며 그 기저에 흐르는 문화적 상징 형식을 해석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당대 서적 신문 잡지 광고를 스크랩하여 도상의 ‘성좌’를 검은 패널에 무작위적으로 구성한 ‘므네모시네 아틀라스’와 같이, 권오상이 무의식이며 자율적으로 하나 하나 구축한 이미지들의 결과물은 거대한 상징적 몽타주로 귀결된다. 즉, 당대의 시각적 에피스테메를 읽어낼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시대 이미지들이 무의식적으로 채집된 그의 연작들은 이 ‘므네모시네 아틀라스’와 많이 닮아 있다. 결국 그가 채집해대는 이미지의 조각들과 몽타주는 그 조각적 구조나 매체와는 별도로 동시대 문화에 대한 집단 기억들의 집합소가 될 수 있는 잠재성도 갖는다.

 

새롭게 선보이는 연작들에서도 여전히 권오상 작가의 고민은 조각의 언어에 대한 사유와 가장 맞닿아 있다. 현저하게 변한 매체와 구조는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하고, 조금 더 촘촘해진 작가의 고민과 성찰의 결은 진지함을 더한다. 더불어 이러한 조각에 대한 사유와는 별도로 권오상 작가의 작품들이 점점 더 흥미로워지는 이유는 그가 채집한 이미지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젠 오디세우스의 이야기 뿐 아니라, 수많은 선원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세이렌의 노래에도 귀를 기울일 때가 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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