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raldine JAVIER: In the Beginning...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은 필리핀 출신의 작가 제럴딘 하비엘 (Geraldine Javier, b.1970)의 개인전, 을 5월 17일부터 6월 12일까지 개최한다. 1970년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태어난 제럴딘 하비엘은 처음에는 간호사가 되기 위해 간호학교에 다녔고, 실제로 간호사로 일을 하기도 했었으나, 곧 자신의 재능을 깨닫고 다시 미술학교에 진학했다. 뒤늦게 발견된 그녀의 재능은 미술학교 시절부터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어 1995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국 내의 수많은 그룹전과 개인전으로 이어졌다. 2003년에는 필리핀 문화 센터가 선정한 13인의 주요 아티스트에 속했고, 2010년에는 홍콩 크리스티 옥션에서 예상가의 7배에 달하는 가격에 낙찰되는 등, 제럴딘 하비엘은 현재 비평적으로는 물론 미술시장에서도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은 '선악과 나무'나 '색동옷을 입은 요셉'처럼 성서에 등장하는 유명한 장면을 제목으로 하고 있지만, 작가의 관심은 특정 종교 자체보다는 그 이면에 상정된 보편적인 영적 세계를 향해 있다. 그것은 카톨릭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필리핀에서 평생을 살아오며 그것과 종속되거나 갈등관계를 맺어 온 작가의 내밀한 개인사로부터 발현되어, 오랜 식민지 경험을 통해 서구에서 유입된 문화가 독특하게 토착화된 동남아시아 만의 독특한 지역성에 의해 포착된다. 즉 그녀는 종교의 논리를 넘어서 모두를 함께 포용할 수 있는 근원적 가치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주로 나무나 새와 같은 누구에게나 친숙한 자연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죽음이나 선과 악처럼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적 주제를 표현한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작품에서는 요리책에 쓰인 가금류 음식의 친숙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만찬을 하는 사람들 보다는 만찬 음식으로 쓰인 죽은 동물을 부각시키고 있고, '십자가형'이라는 작품도 죽어가는 자연과 동물을 마치 십자가형을 당하는 성자에 비유하고 있다. 즉, 성스러운 알레고리는 작가의 내면에서 완전히 소화되어 전혀 다른 소재를 통해 외부로 이미지화 되어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한 방식은 그녀만의 독창적인 기법에 의해 더욱 탄력을 얻는다. 그녀의 작품은 전통적인 회화에 형형색색의 자수나 레이스를 덧붙이거나, 자수가 들어 있는 유리액자를 화면에 설치하는 형식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동물 문양 자수는 필리핀의 토착적인 디자인인데, 자수를 놓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자연물을 만들며 그 이면에 존재하는 영적 세계를 접할 수 있는, 필리핀에서는 단순한 공예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일종의 영적인 활동이다. 즉, 작가는 자신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일상적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작품에 구도자적 의미를 가미하고, 필리핀에 토착화된 서구 종교라는 흥미롭고 이국적인 재료의 매력을 동시에 획득한다.
또한, 이번 전시의 개념적 중심에 놓여 있는 '선 대 악'이라는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나무는 실물에 가까운 리얼리즘 기법보다는 단순하고 힘찬 터치로 표현되고 있다. 가시덩굴이나 미로처럼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때로는 고딕적으로도 보이는 나무는 그림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무의식적 효과를 갖는다. 특히 나무 사이에 자리잡은 ‘새집’은 이번 전시의 주요 모티프 중 하나인데, 마치 선과 악의 각축장처럼 보이는 위태로운 나무 사이에서 연약한 존재로 보이는 새를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교묘한 리듬감을 자아낸다.
제럴딘의 작품을 천천히 감상하다 보면 어둡고 불안한 첫인상이 점점 견고한 논리에 쌓인 복잡하고 아름다운 심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풍경이나 무대 위를 거닐 듯 다양한 이미지를 만날 수 있고, 그것의 병치와 변형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작가가 받은 영감의 원천을 감지하게 해준다. 즉, 제럴딘은 현실을 경험하고 사색하는 행위가 둘이 아닌 하나이고, 또 감각을 통해 어떤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구도자적 태도를 작품으로 옮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 세계 미술계에서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동남아시아 현대 미술의 최신 경향을 살펴보고 그 중에서도 가장 앞서 주목받고 있는 제럴딘 하비엘의 작품세계를 경험해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