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영: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문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은 2023년 10월 17일부터 2024년 3월 3일까지 원로 작가 한만영(b. 1946)의 반세기가 넘는 화업을 아우르는 개인전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문(Passage between the Real and the Unreal)》을 개최한다.
한만영은 초현실주의, 극사실주의 등 다양한 사조의 기법적 특성을 보이면서도 그 어느 것에도 결부되지 않은 채 자유로운 실험과 혁신을 통해 독자적인 예술 양식을 구축한 작가다. 그는 옛 명화나 잡지 이미지, 오래된 기계 부품, 스마트폰 부속 등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기성 이미지와 오브제들을 차용하고 이를 시간 및 공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조형 요소로 삼아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예술과 일상, 창조와 복제, 구상과 추상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공간의 기원> 연작을 선보였으며, 1984년 경부터 현재까지는 <시간의 복제> 연작을 지속해 오고 있다. 1970년대에는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 등의 서양 옛 거장들의 작품 속 인물들을 극사실적으로 재현하거나 생략, 변형하고 간헐적으로 교통표지판이나 의미가 불분명한 기호들을 화면 한 켠에 그려냈다면, 1980년대에는 서양 명화뿐 아니라 한국이나 동양의 고전 작품 또는 이미지를 함께 차용하고 일상의 오브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화면을 복합적으로 구성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특히 나무 박스의 내부를 분할하고 분할된 공간에 각기 다른 맥락의 이미지나 오브제들을 배치한 작품들이 눈에 띄는데, 이러한 사각의 박스 형태는 그의 1970년대 회화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뿐 아니라 5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다양한 재료와 방식으로 작업에 주요하게 등장한다.
1990년대의 한만영은 그간 한정된 틀 안에 머물던 작업에서 벗어난 새로운 설치 작품들로 또 한 번의 변화를 꾀한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시간의 복제 92-T3.M>(1992)은 사각형 형태의 평면과 박스에서 탈피한 새로운 시도였다. 두 단으로 나뉜 박스 상단에는 우리의 전통과 과거를 상징하는 듯한 가야 갑옷이 놓여 있고, 박스의 외부에는 꿈이나 이상, 무한의 자유로운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날개가 달려 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것이 <시간의 복제-여행>(1995)이다. 테이블 위에 브라운관, 책, 불상, 거대한 한쪽 날개, 여행 가방, 우편함 등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처음으로 전시장 벽을 벗어나 실제 공간에 놓인 작품이었다. 비슷한 시기 제작된 <시간의 복제-파고다>(1996)는 76개의 박스 내부에 푸른 하늘을 그려 넣고 거울을 부착한 다음, 박스를 쌓고 중앙에 서너 권의 책과 반가사유상을 올려놓은 작품이다. 작가는 젊은 시절 좁은 작업 공간에서 큰 작업을 하고 싶은 욕구에서 이 작품을 제작했다고 한다. 중앙에 놓인 반가사유상은 동양적 정서를 간직한 오브제로 과거의 시간을 상징하며, 박스 내부를 채운 푸른 하늘과 거울은 현실인 동시에 무한한 추상의 공간이다. 그의 작업에 빈번히 나타나는 하늘, 바다, 깃털, 날개 등은 꿈, 이상, 미래 등을 상징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새로운 범주의 시공간을 상상하게 만드는 기폭제로 작용한다.
한만영의 작업에서 90년대부터 보여지던 추상적 경향은 2000년대 이후 더욱 심화된다. 트롱프뢰유(trope l’oeil) 기법의 환영적 이미지는 평면화되고 형상의 묘사는 가느다란 선으로 축약되며, 사라진 회화적 입체감을 대신하는 요소로서 철사의 그림자가 등장한다. 겸재 정선(謙齋 鄭歚, 1676-1759)의 작품을 기반으로 한 <시간의 복제-금강산>(2004)은 푸른 배경 위에 백묘법(白描法, 동양화에서 윤곽선만으로 그리는 기법)을 연상시키듯 흰색 선만으로 광활한 산세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한 편에는 철사를 병치시켜 놓은 대작이다. 또한 <시간의 복제-노란 선>(2004)은 상하로 분할된 박스 형태인데, 상단은 노란 배경에 호랑이 역시 간략한 선으로만 묘사되어 있으며 하단은 흰색 배경에 노란색 철사가 배치되었다. 여기서 철사는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기성 오브제이자 선적 그리고 추상적 요소로 한만영 작업에서 주요하게 쓰인다. 한편 <시간의 복제-한낮>(2012), <시간의 복제-아침>(2012)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선 드로잉을 볼 수 있다. 좌우로 분할된 화면에서 좌측은 각각 푸른색, 분홍색 배경에 꽃 이미지를 배치했으며, 우측은 레이저 절단기로 철판에서 형상을 오려내고 남은 윤곽선으로만 표현된 인물을 흰색 배경 위에 부착했다. 이 작품들은 과거의 이미지와 현대문명의 상징이 되는 철선을 병치했을 뿐 아니라 기법적으로도 현대의 기술을 도입한 경우다.
한만영은 반세기가 넘는 동안 화단의 유행이나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일관된 예술의 기조를 유지하며 묵묵히 작업을 지속해 왔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세상의 변화에 편견이 있거나 닫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예술세계 내에 머물면서도 도움이 될 만한 새로운 정보나 기술을 부지런히 습득하며 작업의 깊이를 더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기법적 실험과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서 자신의 예술적 지평을 넓혀온 그의 최근작들이 노년의 작가가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고루하지 않고 오히려 더 자유로운 이유이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1970년대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약 70점의 작품들을 한 번에 선보이는 작가의 첫 번째 대규모 전시인만큼 한만영 작가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심도 깊게 탐구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서로 다른 이미지와 오브제들이 충돌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한만영의 작품들을 감상하며 현실 너머에 자리한 자유로운 상상과 사유의 시공간을 느껴보는 기회를 가져보기 바란다.
한만영 작가는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으며,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11년까지 성신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현재 동 대학의 명예교수이다. 1979년 서울 한국화랑을 시작으로 가나아트센터, 노화랑,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상파울루 비엔날레, 아시아국제미술전, 국립현대미술관, 토탈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다수의 단체전에서 작품을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