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 사에구사: 어디에도 없는: Solo Exhibition
유키 사에구사(b. 1987)는 유채와 템페라를 주재료로 한 회화 연작을 중심으로 다양한 재료 및 매체를 실험하는 작가다. 개인의 복합적인 기억 및 관점에 의해 의식 속에서 재구성된 관념적 세계의 풍경을 선보인다. 작가는 일본 전통 산수화와 북유럽 플랑드르 회화를 작품세계의 참조점으로 삼는다. 동서양 화풍을 복합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시도의 일환이다. 자신의 고향인 아즈미노 시(安曇野市)의 경관에 바탕을 둔 풍경화는 여러 시점을 하나의 화면에 담아낸 동양 산수화의 구도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플랑드르 회화의 세밀한 묘사 방식과 신비한 서사 구조를 떠올리도록 한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3층과 4층에서 진행되는 이번 전시에서는 특유의 섬세한 필치가 돋보이는 회화 30점과 병풍 4점 등 총 34점의 작품을 다채롭게 만나볼 수 있다.
화폭에 담긴 장면들은 “누군가의 마음속에 존재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장소”에 관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사실처럼 정교하게 묘사된 각각의 장면은 개인의 일상적 경험, 주관적 기억 및 상상의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세필로 정밀하게 쌓아 올린 풍경의 곳곳에서 만화적 형태를 띤 작은 동물들이 목격된다. 다른 세계에서 온 듯한 이 존재들은 작가 및 관객의 투영체이다. 작가는 캔버스 외에도 개인적으로 수집한 판지와 병풍 등의 재료를 회화의 지지체로 활용하는데, 그의 표현에 따르면 “한 번 쓰임을 다하여 버려질 예정이던 사물”들이다. 사에구사는 지지체 표면의 주름과 얼룩을 “재료의 기억(素材の記憶)”으로 본다.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통하여 저마다의 재료가 가진 고유한 기억과 본인의 생각 및 몸짓의 흔적을 뒤섞어 “어디에도 없는” 그만의 화면을 구축해 낸다.
〈중력을 가진 달〉(2023)은 오래된 금빛 병풍 위에 일본화 물감으로 채색한 작품으로, 중력과 시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고민을 소재 삼는다. 병풍 주위 벽면에는 한 해와 달, 하루의 시간을 상징하는 12점의 회화 연작 〈블랙홀 태양〉(2023-2024)이 공전하듯 둘러싼 모습으로 선보인다. 낡고 오래된 병풍의 시간과 작은 ‘블랙홀’들의 중력이 유기적으로 관계 맺으며 하나의 공간 안에 어우러진다. 전시와 동명의 회화 작품 〈어디에도 없는(Not Even on Ship)〉(2023)의 화면 중앙부에 정박한 금빛 배는 끝나지 않는 항해처럼 지속되는 회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은유하는 도상이다. 주어진 쓰임에서 멈추지 않고 지지체로서 재탄생한 재료들에 대한 생각을 포괄하는 의미로서다. 고정된 목적지가 없으며 나아갈 항로를 특정하지 않았기에, 사에구사의 화면은 끝없이 탐구 가능한 미지의 세계이다.
유키 사에구사는 1987년 일본 나가노현에서 태어나 2010년 나고야예술대학교 유화과 학부를 졸업한 후 현재 일본 아이치현 기타나고야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서울, 한국, 2024), 갤러리 A(시즈오카, 일본, 2022), 에비수 아트랩(아이치현, 일본, 2022; 2017; 2013; 2012)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서울, 한국, 2024), 분카무라 갤러리(도쿄, 일본, 2023), 아라리오갤러리 상하이(상하이, 중국, 2022), 긴자 츠타야 서점(도쿄, 일본, 2021), 나고야 전기문화회관(아이치현, 일본, 2017) 등이 개최한 단체전에 참여했다. 나고야예술대학(일본) 등의 기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