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기: 0 time
김순기의 영상작품 <Voie-Voix Lactée>(1988)는 파리와 서울 간의 여정을 기록한 비디오를 한 시간짜리 영상으로 만든 작품이다. 파리에서 출발하여 서울까지, 다시 서울에서 파리까지 각 18시간의 왕복여정을 60분이라는 비디오 테이프의 한정된 시간으로 촬영하는 동시에 편집하여, 촬영시간이 곧 편집시간이 된 작품을 만들었다. 오고 감의 방향과 시간들이 서로 뒤섞여 18시간의 왕복 비행시간, 1시간이라는 테이프의 촬영 및 편집시간, 그리고 8시간이라는 두 국가 간의 시차를 모두 담아낸 이 작품에서 그는 파리로도, 서울로도 향하지 않는 또 다른 항로의 시간을 만든 것이다.
지난 50여년간 국제무대에서의 활동과 비교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던 그의 국내 전시 횟수 때문일지, 끊임없이 작업을 계속해오고 있었던 김순기의 예술세계는 그간 이해하기 어려운 무언가로 인식되기도 했다. 모호하고 복잡한 미학적 개념을 맞닥뜨리길 예상했던 나에게 <Voie-Voix Lactée>에 대한 설명은 이러했다. ‘파리-서울’ (+) ‘서울-파리’ = 0 Time(제로타임). ‘영 시간(0 Time)’이라고 적혀진 컨셉 드로잉을 보니 뭐랄까, 허무했다. 김순기는 파리와 한국 사이에서 어떤 여행을 떠난 것인가? 그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
1990년 이전 냉전 중 유럽행 항공노선들은 소련과 중국 영공을 통과할 수 없었기에 앵커리지 국제공항에서 중간기착하는 북극의 우회항로를 통해야만 했다. 파리에서 출발해 암스테르담, 앵커리지, 도쿄를 거쳐, 서울로 도착하는 장장 18시간의 비행이었다. 김순기는 앵커리지 공항에서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노라면 즐거웠다고, 여행 중에 해와 달이 두 번 뜨고 지는 것을 볼 수 있었으니까. 긴 여정이었지만 힘들지 않았다며 이 비행을 회고했다. 앵커리지 공항에서 늦게까지 지지 않는 북극의 해를 바라보던 김순기는 땅과 하늘, 동양과 서양, 한국과 프랑스, 그 여덟 시간 시차 사이의 틈을 미끄러져 가는 중간이었을 것이며, 작가의 말을 빌어 ‘여기도 저기도 이고, 여기도 저기도 아닌’ 어딘가, 바로 ‘0 Time’이었을 것이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이 작품의 맥락은 들어갈수록 깊고 복잡해진다. 뉴턴식 사고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시간이란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을 의미한다. 시계바늘이 돌아가는 것이며, 오늘에서 내일로 넘어가는 것이고, 되돌릴 수 없는 그것이다. 하지만 시간에 대한 문제성과 그 의미에 대해 질문했던 김순기에게 시간이란 과거와 현재와 내일을 의미하는 화살표가 아닌, 절대적 세계 안에 있는 부분들 간의 유기적이고 순환적인 교류가 있게 하는 가능성이다. 이 사고는 진정한 앎을 위해 나를 버림(無我)으로써 우주 대자연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열림에 이르고자 하는 동양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시작과 끝을 기록하는 타임스탬프가 찍힌 영상을 실시간으로 뒤섞어(montage-editing et réalisé en temps réel) 편집한 <Voie-Voix Lactée>에서 어제와 오늘이라는 시간성, 그리고 오고 감이라는 방향성의 경계는 무의미해지며, 파리와 서울을 여행한다는 맥락은 여러 번 뒤집힌다.
김순기의 이 0으로 향한 여행은 그가 즐겨 사용한 매체인 비디오를 만나 그 맥락을 확장한다. “난 기록은 하되 지난 모습들을 되살려 보여주는 의미로서의 재현기록이 아닌 살아있고 real time을 재현하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했었다. 그때 바로 빛과 시간으로 그려볼 수 있는 비디오가 나에게 왔던 것이다”라고 말한 김순기는 멀티미디어에 대해 “열려진 행위이고 규정되지 않은 장”이라고 설명한다. 나아가, 이를 ‘오픈 미디어’라고 부르며 “생각의 움직임, 혹은 그냥 움직임의 자취, 한번 그은 붓 자국, 발걸음, 형식도, 구별도, 위계도 없지만 무한히 변화하여 모든 장과 시간을 동시에 포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열린 가능성, 새로운 세계는 0, 무(無), 침묵,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혼돈과 패러독스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아무것도 없고 말하여질 수 없는 긴장된 침묵이 인간의 삶에 진정한 현실(réel)로서의 가치를 부여하는 상황(situation) 인 것이다.
작품의 제목인 <Voie-Voix Lactée>도 흥미롭다. 은하수(voie Lactée)의 voie(길, way)와 동음이의어인 voix(목소리, voice)를 함께 배치한 이 말장난은 ‘언어장난(language game)을 좋아한다’는 김순기의 작업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김순기에게 유희는 단순히 누구와 논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 인터뷰에서 “언어의 한계와 규율을 벗어나서 언어들 외 모든 삶의 태도와 열림”을 이야기 한 것처럼, 그의 장난은 객관적으로 실증적인 범주들이 보이지 않는 영역과 자연스럽고 우연히 만나게 한다. 다시 말해, 네와 아니오, 안과 밖, 위와 아래, 전통과 현대, 정신과 물질, 꿈과 현실 등 관습적으로 설정된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듦이 이루어지는 과정인 것이다. 동서양 사상의 한계를 넘어 대립과 모순을 일으키는 조건까지도 껴안는 <Voie-Voix Lactée>는 이렇게 다양한 해석의 결을 숨기고 있다.
김순기의 아라리오갤러리 전시 《0 Time》은 시간, 가로지름, 그리고 일필(一筆, 한번 그은 붓 자국)의 개념이 순환적으로 연결되는 연통관과 같은 구조로 구성되었다. ‘0 Time’이라는 개념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계의 국가들을 가로지를 여행이 있어야 했고, 이 ‘가로지름(traversé)’에는 경계와 한계, 편견을 넘어 무한한 열림을 있게끔 하는 정신인 ‘일필’이 얽혀있다. 이러한 전시 방식은 시간적 흐름이나 주제로 전개되지 않고, 상반되는 개념들이 역설적으로 공존하는 상황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얻어진 우연한 가능성을 시적으로 변모시키는 김순기의 사고의 방식 자체를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김순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규정짓기에 익숙해진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으로 과거를 소환할 수 있는 오늘날 말이다. 모든 것을 열린 가능성으로 해석하는 김순기의 작업을 마주하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알면서도 모르는 것과 모르면서도 아는 것, 지금도 모르면서 앞으로도 모를 것, 이런 삶에 대한 이해의 희망을 찾아보고자 한다. 합리적인 시각으로는 볼 수 없었던 더 진실한 생의 질서는, 그의 예술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지 않을지. 비엘-메종(Viels-Maisons)의 한적한 농장에서 은하수 속으로 빠졌다가 서울로 뚝 떨어진 것 같은 김순기처럼 사실 이미 여기에 나와 같이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