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 누그로호: Lost in Parody
아라리오갤러리는 인도네시아에서 현대 미술을 대변하고 국제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에코 누그로호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누그로호는 벽화, 걸개 그림 등 대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매체를 기반으로 조각, 퍼포먼스, 만화책 등 예술의 영역을 확장시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누그로호가 미술대학을 다닐 당시 인도네시아는 정치사회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 30여년간 인도네시아를 집권한 수하르토 정권을 몰아낸 개혁 운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던 작가는 민주주의를 얻기 위한 혁명, 그 과정에 수반된 개인의 의지와 집단의 폭력성을 모두 경험했다. 거리의 시위에서부터 시작한 인도네시아의 변혁은 팝아트나 만화와 같이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시각 미술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대학교 때부터 만화를 그려온 누그로호의 작업 전반에서는 인도네시아의 신화와 우화를 바탕으로 한 전통 인형극인 와양(Wayang)에서 받은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표현 기법을 인도네시아의 직물 염색법인 바틱이나 자수와 같은 지역적 기법과 연결시켜 작가만의 독자적인 표현 방식을 구축해왔다.
이번 《Lost in Parody》는 2013년 서울에서 개최한 개인전 이후 8년만에 한국에서 열리는 두 번째 개인전으로 누그로호의 신작 20여점이 전시된다. 지하 전시장에 설치된 3.5미터가 넘는 대형 자수 작품은 인도네시아의 한 작은 마을의 전통 자수 기법에서 시작한다. 현대 사회 속 전통 자수 사업을 지속할 수 없었던 마을의 전통 자수를 살리기 위해 작가는 협업을 제안했고, 2007년부터 이 ‘자수 회화(embroidered painting)’를 제작해 오고 있다. 누그로호는 지역사회와의 협업을 통해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실천하고, 기술에 밀려 소외되고 무가치해진 수공업자들에게 예술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고, 동시에 그들의 기술이 예술 생산에 활용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 가치를 되찾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처럼 예술과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질문이자 실천으로 시작된 자수 회화 프로젝트는 지역 공동체의 가치와 그에 대한 작가의 믿음을 대변한다.
2층에 전시된 정방형의 캔버스 작품에서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주목하고자 한 만화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용과 싸우는 기사, 인도네시아의 울창한 정글 속 얼굴을 가리고 잠복해 있는 피에로와 원숭이, 흐드러진 꽃 속에 티셔츠를 입고 서 있는 인물들은 모두 눈만 보이게 그려져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가리고 있는 이들의 눈에서는 특별한 의도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작가는 가면, 즉 가려진 얼굴에서 민주주의와 평등 그리고 평화 이면에 숨어있는 폭력과 차별, 그리고 역사가 목도해온 혼란을 비춰보고 있는 것이다. 만화의 한 컷처럼 화면을 가득 채운 누그로호의 화려한 붓질에서는 화합과 평화를 줄곧 소망해온 작가가 느껴온 혼란의 감정을 읽어 볼 수 있다.
에코 누그로호(b.1977, 인도네시아)는 뉴욕 아시아 소사이어티(2017),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즈 미술관(2016), 파리현대미술관(2012), 후쿠오카 미술관(2004)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싱가포르 현대미술관(2017), 프랑크푸르트 미술관(2015), 광주 비엔날레(2014), 베니스 비엔날레 인도네시아관(2013), 리옹 비엔날레(2009), 부산 비엔날레(2008)와 같은 전시에 인도네시아와 아시아를 대표하는 참가하며 국제적으로 활발히 활동해왔다. 인도네시아의 전통 인형극을 재해석한 와양 보코르 극단, DGTMB(Dagingtumbuh) 만화책을 이끌며 퍼포먼스, 공예, 디자인 등 미술의 영역을 전방위로 확장해왔고, 삼성 갤럭시(2017), 루이비통 컬렉션(2013)과 같은 기업과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평화는 항상 논의되는 주제이지만 실제로 지구상에 진정 평화로운 장소는 없다. 우리는 여전히 전쟁을 '조화'를 위한 전략으로 사용한다. 나아가, 나는 피부색과 이데올로기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경계를 짓는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미화되는 과정도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분열하기 위해 뭉친다. 우리는 항상 아름답고 예쁜 것들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을 실행하기 위해 역겹고 지독한 언어를 사용한다. 내가 이 사회에서 소란스럽게 발생하는 일에 관하여 탐구한 작업 일부이다. 이 작업을 통해 우리는 민주주의, 공동체, 사랑, 평화의 의미에 대하여 함께 웃으며 바라볼 수 있다. 나는 이 패러디가 재미있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 에코 누그로호의 작가 노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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