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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포트폴리오를 쫙 펼쳐보면 맹렬하게 바뀌는 흐름이 느껴지지만, 대외적으로 ‹데일리 픽션› ‹The Great Chapbook 1› ‹The Great Chapbook 2›의 이미지가 강한 것 같아요. 특히 밴드 ‘혁오HYUKOH’의 앨범 커버 네 장을 작업하며 대중에게 큰 어필을 한 게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으로 작용하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혁오의 앨범 커버 작업으로 제가 대중에게 알려졌을 때 그게 스테레오타입이 될 수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죠. 누구나 작업을 하면 스테레오타입이 생기기 때문에 그걸 엄청난 압박으로 받아들인 적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저라고 다른 사람을 스테레오타입으로 보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가수 나얼 씨가 무슨 노래를 한다고 하면, ‘아 나얼 씨가 나얼했구나’라고 말하는 거랑 똑같은 거니까요. 물론 당사자인 나얼 씨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지만, 결국 모든 사람은 당연히 타인을 스테레오타입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걸 굳이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건 오히려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해요. 혁오 앨범 커버가 제 작업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오히려 미술계 밖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게 큰 영향을 주었죠. 제가 혁이 앨범의 아트 디렉터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 쪽 사람도 알게 되고, 뮤직비디오 감독, 포토그래퍼, 스타일리스트 등 다양한 업계 분들에 대해 알게 된 포문을 열어주면서 그것 때문에 제 작업이 조금씩 변했다고 생각해요. 평소와는 다른 이미지들을 보면서 제가 좀 더 말랑말랑한 사람이 된 것 같거든요.
혁오가 2020년 발표한 ‹사랑으로› 앨범 커버에는 볼프강 틸만스의 사진 작업을 사용하면서 협업도 마무리된 느낌인데요. 이에 대해 아쉬움은 없으신가요?
일단 대답을 먼저 하자면, 아쉽지 않았어요. 볼프강 틸만스와 함께 앨범 커버 작업을 할 수 있게 됐다고 연락을 받았을 때, 저는 틸만스가 너무 좋은 작가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와 해야 하지 않냐고 말했어요. 그리고 혁이 입장에서는 그 앨범이 약간 다른 성격이었거든요. 원래 만 나이를 앨범 제목으로 삼아서 작업하기 때문에 아마 다음 앨범은 기존의 결이 이어지는 앨범 커버가 다시 붙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보고 있어요. 하지만 꼭 제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이어서 해도 되니까요. 볼프강 틸만스의 사진과 ‹사랑으로›는 정말 잘 어울렸어요. 진짜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고 하면, ‹사랑으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혁오의 앨범이거든요. 음악적으로요. 거기에 제 이름이 안 들어갔으니 그런 면에서 아깝죠. 근데 뭐 혁이가 카니예 웨스트도 아니니까요. (웃음)
오혁 씨와 인연이 깊다고 알고 있어요. 오혁 씨는 작가님에게 어떤 분인가요?
개인적으로 그 친구를 리스펙하는 면이 있어요. 정말 많은 걸 보고 그걸 얘기하는 친구이기 때문에 그 트렌디한 걸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면서 많이 배우기도 했죠. 근데 친한 사이인 만큼 저를 심적으로 괴롭힌 면도 크기 때문에 감가상각을 하면 0인 것 같네요? 하하.
트렌디한 걸 놓치지 않으려는 이유가 뭘까요?
그 말에는 좀 어폐가 있을 수 있는데요. 그 친구는 그냥 계속 뭘 많이 봐요. 그리고 계속 생각하고, 말해요. 그런 걸 제가 트렌디하다고 느끼는 거죠. ‹사랑으로›를 좋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어요. 혁오가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지면서 스테레오타입도 생겼거든요? 근데 그 친구는 물론 고민도 했지만, 약간 ‘상관없는데?’ 이런 태도가 있었어요. 혁오의 스테레오타입을 이용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데 그런 방식을 채택하지 않고 지금 자기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걸 해야 한다는 태도. 저보다 훨씬 큰 유혹 앞에서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게 대단하면서도, 대중들이 요구하는 것만 하지 않고 다른 걸 계속 추구했을 때 약간 ‘쯧쯧쯧’ 한 적도 있거든요. ‘굳이 왜 그러냐, 예능도 좀 나가라’고 한 적도 있는데 자기가 집중해서 하고 싶은 것을 했을 때의 완성판을 ‹사랑으로›에서 본 것 같아서 굉장히 감동했고, 그런 의미에서는 많은 영감을 주는 친구예요. 결국 이런 거죠. 20대 초에 ‹무한도전›에 나오면서 잘됐어요. 앨범 미팅할 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처럼 계속 같이 있었는데 회의를 하면 소속사 쪽 사람들이나 우리들은 대중영합적인 얘기를 할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는 늘 ‘그런 건 하고 싶지 않다. 자기가 생각했을 때 제일 멋있는 걸 해야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계속 남을 수 있다’ 이러니까, 저희도 어떨 때는 ‘그래’라고 하지만, 또 어떨 때는 ‘그래도 이런 거는 좀 그냥 하는 게 어떠니? 정신 좀 차려’ 이러기도 했는데 계속 묵묵부답인 부분이 있었단 말이죠. 그렇게 3~4년이 지났을 때 나온 ‹사랑으로›는 저도 납득이 가는 앨범이었던 거죠. 물론 제가 오케이를 한다고 걔가 기뻐하진 않겠지만(웃음), 어쨌든 저는 그런 느낌이 좋았으니까요. 어렸을 때는 맨날 제가 밥 사 먹이는 친구였지만, 서로 커리어가 쌓이고 나니 그런 태도가 부러웠고 무척 좋게 다가오더라고요.
요즘 작가님은 최신작인 ‹The Great Chapbook 4›을 통해 변화를 시도하고 계세요. 수성 유화 대신 에어브러시를 사용하시는 이유가 궁금해요.
저는 하루 단위로 시스템을 살아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무언가를 빨리 그려내야, 다음 이미지로 또다시 빠르게 받아낼 수 있어요. 그림의 크기가 커질 때 가장 빨리 그릴 수 있는 용이한 방식은 에어브러시예요. 작업 맥락과 연결된 부분도 있고요. 에어브러시가 캔버스와 물리적으로 직접 닿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라서 제 신체가 들어가지 않는단 말이죠. 그렇다고 또 이게 아예 안 들어간다고 말하기도 애매해요. 이런 애매모호한 도구의 특성이 제가 가진 태도와 굉장히 유사하죠. 가상과 현실을 계속 왔다 갔다 하니까요. 이런 걸 은유할 수 있는 도구로서 에어브러시가 잘 어울리는 거죠.
요즘 젊은 회화 작가들이 에어브러시를 많이 사용하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말하는 이유와 상응한다고 봐요. 완벽하게 신체성이 들어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 가상도 아닌 어떤 매개가 필요한 거죠. 실제 작업하는 사람들끼리 많이 하는 말인데, 그림을 붓으로 그리는 것과 에어브러시로 뿌리는 감각 간의 이질감이 지금 저희가 사는 세상의 상황, 즉 스마트폰을 통해 가상의 세계와 연결되지만, 동시에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자신이 융합되는 모습을 잘 은유하기 때문 아닐까, 하는 거죠. 그리고 이런 점도 재미있어요. 원래 에어브러시가 굉장히 고전적인 미술 도구인데요. 이게 한동안 안 보이다가 갑자기 요즘 돌아온 이유에 대해서 디지털 페인터가 큰 역할을 했다고 봐요. 포토샵의 에어브러시 툴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가 굉장히 많은데요. 근데 실제로 그들이 실물의 에어브러시를 써봤냐 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포토샵으로 작업 인생을 시작했고, 그래서 포토샵에 있는 에어브러시 툴을 자연스럽게 쓰는 건데, 이런 이미지들을 많이 보다 보니 현대미술 작가들도 이렇게 그리고 싶은 마음이 동하는 거죠. 근데 조사해보니까 이게 원래부터 존재하던 미술 도구인 걸 알게 된 거죠. 원래 포토샵은 현실의 에어브러시를 따라서 툴 기능을 만든 건데, 지금 사람들은 포토샵의 에어브러시 효과를 따라 하고 싶어서 진짜 에어브러시를 찾게 되는 거 같아요. 그렇게 되면서 다들 에어브러시를 새로 써보게 되는 거 아닐까 싶어요. 포토샵에서 써먹던 그 감각을 현실에서 그림을 그릴 때도 적용하고 싶다. 감각이 넘어온다는 것은 아까 말한 왔다 갔다 하는 감각과 붙어있는 말이기도 하죠.
방금 말씀하신 포토샵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롭네요.
일단 저는 그렇게 해석하고 있어요. 물론 다른 이유도 더 있죠. 미술을 그렇게 한 가지로만 후려칠 수는 없으니까요. 스트릿 예술의 그래피티 이미지와도 연관이 있어요. 최근 한 5년간 스트릿 예술가들이 전시장으로 호명된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피티도 또 다른 의미로는 에어브러시의 일종이니까요. 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린 그래피티의 미감이 영향을 미쳤다고도 봐요. 제가 보기에 그런 분들은 똑같은 에어브러시 작가로 보면 안 되는 측면이 있는데요. 어찌 됐든 가상, 현실, 신체성에 대한 것을 어떻게 아웃풋으로 내놓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일환으로 다들 여러 방식을 찾고 있고 에어브러시도 그중 하나라고 얘기할 수 있겠네요.
혹시 작가님은 작업을 진행하며 보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아쉬운 점이 있으신가요?
작업 언어만 보면 저는 단점도, 약점도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가장 지금’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따라서 보강도 하지 않는 게 지금의 태도라고 생각해요. 정보가 너무 많이 흩뿌려져 있고 작가가 좋아하는 만큼 수확해서 이미지를 만드는 게 작금의 현실이기 때문에 뭔가 덧대고 싶지 않고, 덧대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거죠. 제가 요즘 고민하는 건,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 한 장, 한 장이 더 강해야 하고, 더 살아남아야 한다는 점이에요. 아무도 전체적인 맥락을 읽으려고 하지 않아서요. 지금 전시를 열라고 종용하는 태도가 마치 디지털 싱글을 내는 사람에게 “정규 앨범이 진짜 음악 작업이지~”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이미지 하나로 살아남고, 거기에 모든 걸 압축해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제가 약한 면이 있다고 봐요.
이미지를 강하게 만드는 해답은 찾으셨나요?
아무래도 제가 ‘지도’ 작업이라고 부르는, 드로잉한 그림을 한데 모으는 작업이 가장 강력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저의 이미지로 대표되고 있기도 하고요.
작가로서 내 작업이 살아남기 원하는 욕망은 없으신가요?
저는 작업에 위계를 두는 편도 아니고, 제게 이미지가 들어와서 다시 나갈 때 즐거웠으니까 그 과정을 즐기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애정하는 편입니다.
어떤 인터뷰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 즉 내러티브는 이미지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제가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제가 보고 있는 것, 혹은 시대의 인상이 그렇게 바뀌고 있어요. 예를 들어 두 시간짜리 영화와 10분짜리 유튜브 영상, 11초짜리 인스타 스토리 중 어떤 게 즐거울까의 문제죠. 점점 짧아진다는 걸 제가 느끼기도 하고, 내러티브가 빠지면서 이미지만 남는 게 요즘 매체 언어의 속성으로 작용하니까요. 근데 이미지가 내러티브가 아니냐, 그건 아니거든요. 사람들이 이미지를 통해 무언가를 느끼니까요. 결국 그 정도만 작동하는 세계관이 지금 열리고 있고 점점 짧아지고…그게 지금 시대의 이미지 언어가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두 시간에 말해야 하는 내용을 10분으로 압축해 말하거나, 혹은 아예 두 시간짜리 이야기를 지을 생각조차 안 할 수도 있고, 10분짜리 이야기 대신 아예 이미지 한 장만으로도 이야기가 연성되는 단계로 나아가는 거랄까요. 더 이상 이야기를 쓰지 않고 자극적인 단초만 제공하는 것 자체에 호응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세상에서 이제 세계관만이 만들어지고 있는 거죠.
저희 같은 사람들은 굶어 죽겠네요. (망연자실)
아, 그렇다고 두 시간짜리 영화가 안 나오는 건 아니잖아요? (웃음) 요즘 저는 오히려 다시 페인팅이, 조각이 보고 싶어요. 뉴미디어를 체험하고 나니까 역으로 뉴미디어의 중간에 있는 것에 관심이 가지 않고 가장 원시적인 것에 끌리는 거죠.
어느 정도로 원시적이요?
사람이 손으로 그린 것, 만든 것이 제게 강렬하게 오고 있어요. 이 시대에서 신체를 떠나는 것을 너무 강조하니까 반대로 더 신체적인 걸 좋아하는 거 아닐까 유추하고 있어요. 제가 회화를 놓지 않는 이유 아닐까, 생각도 들고요. 나는 왜 회화를 하는가에 대한 어떤 답이기도 한데, 그런 면에서 글도 가장 원초적인 것에 해당하니까 살아날 것 같아요. 결국 뉴미디어와 원시적인 것 중간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이 죽지 않을까? 그러니 어설픈 데 있지 말아야겠다, 이런 얘기예요.
어설픈 예로 무엇이 있을까요?
수업 때 많이 이야기하는데요. 예를 들어 3D, VR 아트가 유행하기 전에 애프터이펙트나 포토샵을 활용한 작업이 유행했었어요. 뉴미디어라고 하면서. 지금 보면 정말 모두가 할 수 있는, 스마트폰으로도 충분히 구현 가능한 수준이에요. 그때 활동하던 작가들을 지금은 아무도 호명하지 않거든요. 이런 관점에서 지금 3D, VR 작업을 하는 작업은 추후 더 발전된 뉴미디어가 나오면 애매모호한 상태에 빠질 확률이 높을 수 있는 거죠. 그렇다면 앞으로 계속 보고 싶은 건 맨 뒤에 있는 회화, 조각, 글은 아닐까 고민이 드는 거예요.
“저에게 미술이란 동시대 혹은 세대가 공유하고 있는 감각과 정서에서 발견되는 이미지의 정치학을 연구/조사하고 시각적으로 완성도 있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트위터에서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작가님이 정의하는 미술은 아주 명확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문장을 만들기까지 1년 동안 계속 고쳤어요. 제가 장르 구분이 너무 없는 사람인지라 그래서 더욱 장르 연구를 해야만 했기 때문에, 미술은 무엇이고, 동시대에서 미술이 무슨 기능을 해야 하는지 굉장히 오랫동안 고민할 수밖에 없었어요. 동시대 미디어 환경에서 이미지로 소비되는 것들을 제가 보고 그 정서에서 어떤 감각인지 발견한 후. 이 감각이 왜 나왔을까 고민하잖아요. 에어브러시를 예로 들면, 왜 갑자기 요즘 들어 에어브러시로 그린 그림이 많이 보일까? 저에겐 이게 동시대이니까 그 출현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죠. 그리고 그 이면에서 기능하는 장치도 고민해 보고요. 에어브러시는 가상과 현전을 오가는 지형도의 변화를 보여주는 단초라는 결론이 나오면 ‘아 그래서 에어브러시로 그리는 그림이 계속 보였구나’ 납득하면서 그 소스를 가지고 작업을 해야겠죠. 원래 여기까지만 썼었는데 뭔가 아쉬운 거예요. 그냥 보여주기보다, 기가 막혀야 하거든요. 그래서 ‘시각적으로 완성도 있게’라는 말을 덧붙였어요. 연구와 조사를 통해 이미지의 정치학을 찾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완성도를 획득해야 하니까요. 제가 궁극적으로 되고 싶은 사람도 이런 과정을 밟아서 가장 완성도 있는 시각물을 만드는 사람이에요. 그 기준에 대해서는 계속 바뀔 테니, 계속 생각하고 노력해야겠죠. 생각만큼 잘 되고 있진 않지만. 사실 동시대 혹은 세대도 미술적 수사에 가까워요. 사실은 ‘내가’죠, 근데 대놓고 말하면 조금 민망하니까… 하지만 그 작업물을 보는 사람은 저에 한정해서 읽지 않고 세대, 시대, 시간대까지 염두에 두니 틀린 말은 아니에요. 이미지의 정치학이란 말도 제 눈에 많이 보이는 것에 대한 다른 연유를 통칭하는 단어랄까요. 그래서 많이 보이는 것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고민해보는 것이죠.
혹시 많이 보이는 것 중에 부정하는 경우도 있나요?
부정해야 하는 건 아닐까, 윤리의식을 세우려고 노력하긴 해요. 동시에 이게 시대적 현상 중 하나라고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기도 하죠. 그런 점에서 연구 조사할 때 충돌이 생기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최근 3D 이미지에서 자주 나타나는 이미지로 여성 신체 훼손이 있어요. 3D도 너무 많으니까 더 자극적인 걸 추구하게 되는데요. 여성이 좀 더 사이보그로 바뀐다든지, 이상하게 강화된 신체처럼 보인다든지, 가슴이 너무 커진다든지 이런 이미지를 만들어서 시각적으로 좀 더 머무르게 만드는 거죠. 이런 게 엄청 많이 보이는데 고민이 돼요. 살아남기 위한 이미지의 종착인가 하고요.
많이 보이는 걸 긍정한다면 이런 여성 신체 훼손 이미지도 다뤄야 하지 않나요?
그렇죠. 그래서 제 작업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지 고민이 드는데, 또 사이보그 중에 어떤 것은 포스트-휴먼과 관련된 작업일 수도 있거든요. 그럴 땐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드니까, 결국 이 애매모호한 경계에 따라 매일매일 내리는 결론이 달라져요. 하지만 확실한 건 제가 보는 건 팔로잉하는 계정에서 나오잖아요. 그건 저만의 큐레이팅 목록이에요. 시공간 자체가 제 윤리에 맞춰서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면, 제 타임라인이 곧 저의 동시대이고, 제 감각과 정서, 그리고 윤리선이겠죠. 제가 팔로잉을 계속 취소하면서 관리하는 이유에요.
‘작업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네요.
그래서 저는 항상 뒤돌아서 생각하는 존재예요.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다시 보면서 ‘아 그때는 이런 걸 좋아했구나, 내가 이런 생각으로 이런 이미지를 모은 건 아닐까, 그때 나의 윤리선은 이랬구나’ 정리를 하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작품에 자신의 삶이 완전히 노출되는 메커니즘인데요. 혹 스트레스는 없나요?
이런 이야기를 아내와 한 적이 있어요. 제가 이런 걸 그리는 게 이해가 안 된대요.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고 마음속에서 싫을 수도 있는데 도대체 왜 그리냐는 거죠. 이건 사실 굉장히 원론적인 얘기인 것 같아요. ‘작가는 왜 작업을 하는가? 왜 무언가를 만들고 누군가에게 보여주는가?’에 대한 동일한 물음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사실 그냥 하는 거예요. 여기에는 정말 답이 없어요. 누가 무슨 계산을 하고 하진 않아요. 만약 ‘멋있어서 했다’고 말할지라도 그 ‘멋’에 대한 기준은 매일 바뀌어요. 그 자체를 어떤 기준으로 세울 수도 없고요. 아내는 답답해하죠. ‘멋있으면 보면 되지 왜 굳이 하냐’고요. 스위치가 올라가는 이유에 대해서는 저도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뭔가 들어오면 뭔가 내보내야 하는 게 당연한 사람인 거예요. 아마 대부분의 작가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어떤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을 내보내야만 하는 강박을 가진 사람들이라고요. 모든 창작을 하는 사람이 가질 수밖에 없는 성향인 거죠.
결국 그런 사람이 작업을 하는 거군요.
언젠가 미대의 장점이 뭐냐는 질문을 받고 엄청 고민했던 적이 있어요. 장점이 너무 없어서요. (웃음) 그러다 이런 얘기를 했어요. 미대에 와서 좋은 점은 딱 한 개인데, 선생님들이 계속 ‘너는 누구니? 너는 뭐 하는 사람이야? 너는 무슨 생각해?’ 이런 질문을 4년 동안 해요. 이게 진짜 미칠 것 같은데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전공을 한 사람들을 만나고 알았어요. 이런 훈련을 미대에서밖에 안 한다는 걸요. 미대를 나온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객관화해서 생각하고, 자신이 이런 사람이니까 이런 걸 해야 한다’는 인식이 빠르게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이걸 4년이나 하는 건 문제예요. 다른 건 안 가르쳐주고. 어쨌든 저는 ‘내가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어떤 가치관을 세우고 그걸 정리하고 아카이빙하는 것 자체가 나를 건강하고 이롭게 한다는 걸 굉장히 믿는 사람이라 작업을 계속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요. 그래서 남들보다 더 많이 보고, 제가 보는 것에 대해 고민을 더 많이 하는 거죠.
자, 저희의 시그니처 질문인데요. 작가님이 창작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무엇이 작가님으로 하여금 창작을 지속하게 만들까요?
아주 작고 소박한 기쁨이 아닐까 싶어요. 예를 들어 하루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무언가를 그리는 행위를 한 후 ‘굉장히 즐거웠다’고 느끼고, 이걸 스캔해서 JPG 파일로 저장하면 폴더에 하나 채워지는데 마치 보상이 하나 채워진 것처럼 다가올 때요. 엄청 크지도 않고, 엄청 작지도 않은 그 정도의 기쁨이 저를 지속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리고 뒤를 볼 때도 그렇고요. 뒤에 쌓여있는 것들을 가끔 보거나 체크를 한 번씩 하면서, 그냥 뭐랄까… 작업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좋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냥 내가 보기에 좋구나’… 이런 부분이 계속 창작을 할 수 있는 동인이 되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비애티튜드»에게 기대하시는 역할이나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편하게 부탁드릴게요.
이 답변까지 읽는 분은 엄청난 텍스트의 강을 건너오셨을 확률이 높아 보여요.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여기까지 오신 분들 덕분에 제가 위안을 얻는다고 얘기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이렇게까지 제게 관심을 가져주신 사람이 잘 없고, 별로 기대하지도 않는데 가끔 그런 분이 있을 때 너무나도 이상한 기분이 들 때가 있죠. 무척 좋으면서 미안하면서도, 뭔가 애매하고 이상한… 암튼 제 마음은 그렇다고 이야기해드리고 싶습니다.